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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14 아이팟의 마지막 수업. (3)

아이팟의 마지막 수업.

아이팟이 뻑이 났어.

2005년 겨울 즈음, 데이빗이 사준 아이팟 5세대 깜둥이 아이팟으로,
내 수중 가장 할아버지 애플템인데.
그 아이가 5년의 세월이 힘겨웠는지,
아니면 나노, 아이폰, 셔플 등등 다른 신입들한테 밀렸다고 심통이었는지,
어제 갑자기 제자리에 얼어버렸어.
오랜만에 승우오빠랑 선영언니가 부른 맨 오브 라만차가 듣고 싶어져서
서랍에 박아둔 할아버지 아이팟을 꺼내어 스피커에 연결했는데
장자자장 장자자장, 기타 소리로 시작되어 "그 꿈 이룰 수 - " 하다가 뚝 끊긴거야.

이거 뭥미 하여 얼릉 달려가 봤는데,
화면은 그대로 밝고 명랑하게 빛나고,
II 가 아닌 > 모양으로 플레이하고 있다고 외치는데
아 글쎄 소리가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야.
버튼을 이거 저거 눌러봐도 아무런 반응도 없으시고
극처방인 중간 동그래미 버튼 + MENU 를 5초 눌렀다 15초 눌렀다 30초 눌렀다
내가 아는 모든 걸 총동원해서 아무리 살려보려고 해도

완전 쿠데타인 거지.

그 안에 있는 사진이며 동영상이며
다른 매체에는 저장도 되어있지 않은 백몇개 되는 공연 앨범들이
뇌리를 솨악- 스치며, 진짜 머리가 하애지더라. 나 백발.

할아버지, 미안해... 이제 와서 아무리 빌어보고 용서를 구해도 요지부동.


일단 학교를 가봐야하니 어떻게 할 수 없고, 밤에 와서 네이버에게 물어보든 어쩌든 해야겠어.
라고 생각하고 반짝 반짝 밝은 아이팟을 침대에 내팽겨치고 다시 빨강 나노를 목에 걸었지 뭐.


하루 종일 문득문득 생각나더라, 내 아이팟. 내 사진. 내 음악.
나 완전 기록광에 변태라서 아무것도 못 버리는 성격인데
이렇게 기계들의 쿠데타에 속수무책 당한 게 한 두번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이렇게 백업도 안 해두고 뭘 믿고 매번 똑같은 실수를 하는지,
하루 종일 왠 종일 기분이 20% 다운 된 채 다녔어.


역시 기계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규.

아.... 슬퍼하며 하루를 보낸 후, 귀가. 아이팟님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봤어.
일단 화면은 꺼졌고, 뜨겁게 달아 오르던 열도 내렸더라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튼 하나 둘 눌러봤는데. 역시 죽었어.

나 또 포기는 빠르잖아.
결국 그냥 스피커 위에 다시 꽂아 놓고 (일종의 장례식)
별 언니랑 전화하며 수다 떨다가
야식으로 쥐포도 구워먹다가 그러면서 잊었는데,  

자기 전에 다시 한번 콕- 소심하게 눌러본 플레이버튼.
디리링~ 리턴 오브 할아버지!!! 이게 왠일 왠떡 왠부활절!!!
진짜 가시기 전에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얼릉 백업부터 했지롱.

알고보니까,

아이팟이 가끔 그럴 때가 있다네?
그리고 그럴 땐 그냥 방전 되게 가만 뒀다가,
완전 방전 되면 다시 충전만땅하구,
그럼 다시 노말하게 잘 굴러 간다는 거야.


재충전을 위해서는 방전도 해야된다. 오늘 할아버지의 지혜로운 레슨이었어. ㅋ




사실 이번 주 온 정신이 가출했었거든.
공연 3개 굴리고 작품 하루에 30장씩 써내고 이사 준비하고
아 나 진짜 이렇게 바빠 본지 또 오랜만이라 너무 따운 되는 거라.
한국 갔다 온 뒤로 새벽기도도 좀 가고, 10시 칼취침에 완전 행복하고 긍정적인 삶이었는데
갑자기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과거의 가시들이 삐쭉삐쭉 돋고,
다시 또 그립고, 우울해지고, 옛날 생각에 센치해지면서 시간 낭비하는 내 모습이
너 무 싫 은 거.

역시, 정한솔 본판이 어디 가겠니.
한국에서 내내 놀다가 왔으니까 건강하게 여유롭게 그랬던 거지,
또 일 시작하니까 스트레스 받고 불규칙적이고, 예민해지고, 아 구려구려.
어쩜 이렇게 오래 가질 못하나. 난 왜 항상 긍정적이지 못하는 걸까.
무릎팍에서 본 세븐은 완전 초 긍정긍정이던데.

이렇게 스스로 못살게굴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잠시 배째~ 하며 뻑났던 아이팟님을 다시 사랑스레 쓰다듬어주며 백업하며 든 생각은,
사람이 어떻게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야. 업이 있으면 다운도 있어야 그게 사람이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둥번개가 치나 계속 쳐 웃고 있으면 그거 정신병이지.
가끔씩 너무너무 힘들어 구덩이에 빠지면 빠진채로 잠시 방전하구,
방전이 완료되면 또 다시 일어서 충전하구,

내 리듬대로 살면서, 어쨌든 중심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야.
내 주인은 내 아이팟의 주인과는 다르게, 매 순간 매 순간 백업시켜 놓는 분이니까.
조금 방전되도, 조금 주저앉아도, 그 전에 쌓아둔 것들은 다 돌아오는 거잖아.

그러므로.
정신 없는 이 시기를 정신 없는 채로 즐기고,
그리움에 달아 오를 때는 달아오르는 대로 느끼고,
속상하고 아프고 누군가가 미울 때는 괜히 안 먹히는 버튼 누르고 있지 말구,
그냥 알아서 꺼질 때까지 잠잠히, 묵묵히, 감정을 소중히 여기면서 가지고 있으면 되.




어제는 이강욱이 꿈에 나와서 슈무얼 복장을 하고 아이팟 1세대를 선물해주고 갔어.
개꿈이겠지만, 그냥 뭔가, 기분이 따뜻한게, 떨어져 있음이 조금은 속상한게,
마음이 따끔따끔한 게.

오늘 하루를 살만큼은 충전된 거 같아.





2010/10/14 23:59 2010/10/1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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